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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흔적을 더듬는이미지 수집가
입력2025-02-10 15:15
수정2025-02-10 15:15

 

12개의 달항아리 사진을 모은 ‘문라이징 Ⅲ’전시 앞에 그가 서 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소년은 카메라를 들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격적인 실험과 내적인 침잠을 거치며 다양한 작품 세계를 펼쳤다. 이제는 묵묵히 시간이 그어놓은 그림을 담는 사진가, 구본창.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글 길다래 기자 사진 박진주 기자

차갑고 쓸쓸한 공기가 내려앉은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길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이하 미술관)으로 향한다. 한국 현대사진의 거장 구본창(71)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미술관에선 그의 대규모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2023.12.14.~2024.3.10.)가 열리고 있다. 45년간의 그의 사진 여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 500여 점과 관련 자료 600여 점을 모은 전시다. 그는 기존 사진계를 뒤흔드는 실험적인 작품으로 한국 현대사진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또 전시기획자로서 국내외 여러 전시를 통해 한국 사진을 세계에 알려왔다. ‘백자’ ‘비누’ 등의 사진 연작으로 대중적인 명성까지 얻었다.그런 구본창을 미술관 지하의 작은 홀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조용조용 움직이며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위층에서 열리는 성대한 전시와 문밖에 슬몃거리는 대중의 인기가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이.

낡고 여린 것을 향한 카메라

소년 구본창은 유독 내성적이고 섬세한 아이였다. 또래와 어울리기보다는 자질구레한 사물을 모으고 그것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마당에 핀 꽃, 흙바닥을 파서 나온 깨진 그릇, 비 온 뒤 도랑에서 건진 자갈과 사금파리 조각들. 내게는 그런 것들이 아름다웠다.(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중)

이 같은 성정은 사내답지 않다며 환영받지 못했다. 6남매 대가족의 틈바구니에서 구본창은 외로웠다. 수재였던 형의 그림자에 가려진 차남의 열등감도 있었다. 그래도 공부를 잘해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해 경영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 같았다. 결국 반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1979년 좋아하는 미술을 공부하러 독일로 향했다. 원대한 목표가 있어서 독일을 택한 건 아니었다. 그저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고, 학비가 무료라는 점에 끌렸다.“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어요. 그곳에선 제가 좋아하는 사소한 물건들, 섬세한 색깔들, 제가 추구한 이런 것들을 칭찬해줬어요.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가 된 듯했죠.”미술이라면 전부 흥미로웠지만 최종적으로 사진을 선택했다.“사진은 현실에서 만나는 특별한 순간·사물·사람을 렌즈에 담는 일이에요. 어떤 절묘한 순간을 담으면 그 이미지는 제 것이 되는 거죠. 옛날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두려워했어요. 그런데 사진가로서는 정말 영혼을 뺏어야지 좋은 사진이 돼요.”렌즈 너머 대상과의 교감. 그것은 어린 시절 하잘것 없는 물건에 마음을 쓰고, 주머니에 담아와 서랍에 고이 보관하던 일과 같은 종류의 행위였다.“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물건이라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고 역사가 있어요. 저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 나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었어요.”

 

시간이 그린 그림

졸업 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한국 사진계를 확실하게 뒤흔들었다. 인화지를 불에 그슬리거나 조각보처럼 실로 꿰매는 등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아! 대한민국’ ‘태초에’ 등은 그렇게 탄생했다. 또 그와 비슷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과 함께 <사진, 새시좌>전을 기획·개최했다.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의 장르로 사진의 외연을 확대했다”는 평을 얻었다.(물론 “이게 사진이냐?”는 기성 사진계의 반발도 있었다.) 계원예대·중앙대·서울예대·경일대 등에서 강의하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작업은 새로운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한국의 전통과 유물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오랜 시간을 담아온 물건이라면, 그것이 귀한 유물이건 일상에서 닳아버린 비누이건 그의 마음을 붙들었다.지금은 여기저기서 ‘달항아리’가 열풍이지만, 그가 ‘백자’를 작업할 즈음(2004~2006년)에는 아무도 수수한 조선백자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만이 백자의 조용한 아름다움에 귀 기울였다. 그는 국내외 16개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던 백자를 열성적으로 촬영했다. 일일이 촬영 허가를 구하고 긴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뎠다. “맨 처음 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미술관에 부탁해서 백자를 몇 개 찍었어요. 그걸 샘플로 만들어 한 집 한 집 두들긴 거죠. 제일 중요한 백자 있는 데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인데 그걸 찍으면서 큰 성과를 얻게 됐어요.”

 

[**캡션**]실험적인 작품으로 한국 현대사진의 새로운 궤적을 그려온 구본창이 <구본창의 항해>전에 걸린 ‘태초에’ 시리즈를 바라보고 있다.1 경기 성남 분당에 있는 그의 작업실. 다소 거칠고 단조로운 공간에서 그의 작품이 탄생한다. 2 함박눈이 내린 작업실 정원의 대나무숲.(사진 구본창 제공)[--캡션--]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물건이라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고 역사가 있어요. 저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 나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었어요.

저마다 서글픈 사연을 갖고 남의 나라로 떠나온 백자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백자는 여기저기 닳고 긁힌 흔적이 많았지만 오히려 우리의 자화상 같아서 좋았어요. 어떤 배경에서 찍을지 많이 고민했는데, 결국 가장 단순하게 한지를 바탕으로 촬영했죠.”그가 촬영한 12개의 달항아리 사진을 모은 ‘문라이징 Ⅲ’은 이번 회고전의 하이라이트다. 둥글고 어두운 전시장 벽면에 걸린 각기 다른 달항아리는 달이 뜨고 지는 모습을 연속으로 찍어놓은 듯하다.그의 또 다른 대표작 ‘비누’시리즈도 그 무렵에 시작했다.“비누를 쓰다 보면 마지막에는 쭈그러지고 주름이 생기고 볼품없어지잖아요. 그렇지만 우리가 썼던 시간의 흐름이 그 흠, 거기 다 간직돼 있어요. 그게 참 애틋해서 그냥 쓰레기통에 버릴 수가 없었어요.”이가 빠진 자리를 자꾸만 혀로 핥는 어린아이처럼 그는 집요하게 시간의 흔적을 매만졌다.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애처롭고 아름다워서, 그는 사진을 찍었다.

렌즈에 담기는 모습들이 그 각각의 사라짐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사진가의 작업과 비누는 공통점을 갖는다.(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중)

 

창작자의 주파수

구본창은 다양한 주제의 방대한 작업을 해온 작가로도 유명하다. 개인 작업뿐만 아니라 상업 사진도 많이 찍었다. 황신혜 주연의 <기쁜 우리 젊은 날>, 이정재 주연의 <젊은 남자>, 최민식 주연의 <취화선> 등 이름만 대면 금세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 포스터들이 그의 작품이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을 해나가는 영감과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한 걸까?“저는 신문·잡지·영화 등을 아주 잡식으로 봐요. 열린 마음으로 매일매일 사는 거죠. 제 마음속에는 폴더가 여러 개 있어요. 완성되지 않았지만 시작한 이미지들이 모여 있는 곳이에요. 그게 어느 순간 계기가 될 때 속도를 내어 시리즈로 완성돼요.”그는 “주파수를 돌리듯 산다”고도 말한다. 상업 작업을 하고, 자기 작품도 하려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재빠른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 타고난 것도 있고, 45년간 훈련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창작은 결국 고독을 밑거름으로 한다.

창작자에게 고독이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자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이다. 모든 창작의 순간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중)

그는 지난 1년 동안 회고전 준비에 몰두해왔다. 다음 작품은 아직 구상 중이지만 신라의 유물에 주목하고 있다. 사진가가 아닌 구본창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사실 모든 에너지를 사진에 쓰긴 하지만, 쉬고 싶을 때는 정원에 나와 식물을 관찰해요.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모습을 눈여겨보죠.”‘마당에 핀 꽃, 흙바닥을 파서 나온 깨진 그릇’ 같은 걸 사랑한 작가는 여전히 마당을 서성거린다. 함박눈이 내린 마당에 피어난 동백과 매화가 얼마나 예쁜지 기쁜 얼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 “구본창의 항해”는 마침표가 아니라 말줄임표다. 아직도 이야기할 미지의 세계가 그 속에 담겨 있는.

[**캡션**]아버지의 몸에서 생명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기록한 ‘숨’ 연작. 삶과 죽음에 관한 구본창의 깊은 사유가 담겼다.[--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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