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릴 적 친구들은 학교에 다녔지. 나 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지. 설거지해! 애 보고 해! 내 할 일은 그거지. 환장하지∼!”
경북 칠곡 할매들의 ‘유쾌한 일탈’이 한적한 시골 마을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평균 연령 85세 힙합(198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활동적인 춤과 음악) 그룹 ‘수니와 칠공주’는 8월31일 정식 데뷔했다.
리더인 박점순 할머니의 이름 마지막 글자인 ‘순’을 변형해 만든 ‘수니와 칠공주’는 최고령 정두이 할머니(92)부터 막내 장옥금 할머니(75)까지 8명이 뭉쳐 탄생했다. 한달여 동안 맹연습으로 합을 맞춘 수니와 칠공주는 지역 각종 축제와 행사에서 랩과 춤을 선보이며 돌풍을 일으켰다.
지천면 신4리 마을회관은 수니와 칠공주가 탄생한 산실이다. 매주 화·목요일 오후 2시면 멤버 8명은 어김없이 연습장 겸 아지트인 마을회관을 찾는다.
이필선 할머니(87)는 “노랫말을 외우고 손발을 신나게 움직이니 기분이 좋아진다”며 “평생 농사만 짓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 10년은 더 젊어진 것 같다”고 활짝 웃었다. 옆에 있던 김태희 할머니(80)는 “몸이 욱신욱신 쑤시다가도 노래하고 춤추면 아픈 줄 모를 정도로 활력을 되찾는다”면서 “늙어서 관심과 인기를 한 몸에 받으니 더 건강해진 기분”이라며 이 할머니를 거들었다.
데뷔 4개월차 신인 그룹이지만 인기만큼은 웬만한 케이팝(K-pop) 그룹 못지않다. 각종 행사는 물론, 방송 촬영과 인터뷰 등 일정이 빼곡히 잡혔다. 할매들은 활약이 전해지면서 12월까지 공중파 방송 촬영을 비롯해 신문·잡지사 인터뷰 등 스케줄 30여건을 소화했다.
9월엔 수니와 칠공주를 든든히 응원하는 팬클럽도 결성됐다. 회원수는 150명. 주로 아들·딸·며느리·손주·주민이다. 김재욱 칠곡군수도 팬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팬클럽 회장은 그룹 리더 박 할머니(81)의 며느리 금수미씨(52)다. 금 회장과 아들 강경우씨(25)는 그룹활동에 필요한 의상을 구입하는 데 사용해달라며 각각 100만원씩 모두 200만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팬클럽 회원들은 물심양면 할매들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11월초엔 할머니들의 왕성한 활동에 감동한 지역 기업가가 작고한 모친을 생각하며 수니와 칠공주에게 200만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배선봉 산동금속공업 대표는 “어머니 산소 앞에서, 랩하는 할머니들을 도왔다고 말씀드리고 싶다”며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근심 걱정 잊고 행복한 노후를 보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수니와 칠공주 탄생 비화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할머니들은 군이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서 운영하는 성인문해교실을 통해 늘그막에 한글을 깨쳤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치고, 보릿고개를 넘으며 한국 근대화를 이끈 어머니들이다.
멤버들은 가난과 여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늦게나마 깨친 한글은 한평생 고난과 설움을 또박또박 시구로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1년에 한번 성인문해교실 학예발표회를 준비하며 할매 중 한분이 TV에서 봤던 랩과 춤을 떠올렸고, 8년 동안 신4리 문해교실 강사로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했던 정우정 강사에게 제안했다. 할머니들이 마음으로 지은 시는 정 강사의 손을 거쳐 어엿한 랩 노랫말로 거듭났다. 수니와 칠공주는 활동을 시작하면서 무려 여섯곡을 선보였다. 그렇게 대표곡 ‘환장하지’ ‘황학골에 셋째딸’ 등이 가슴 뭉클한 노랫말로 재탄생했다.
“흑잿골∼ 아니! 송정골∼ 아니! 황학골에 셋째딸로 태어났쓰. 오빠들은 모두 공부를 시켰쓰. 딸이라고 나는 학교 구경 못했쓰. 에이 우라질 우라질 우라질.”
여기에 춤은 한때 래퍼로 활동했던 군청 공무원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젠 랩 노랫말에 맞는 안무도 할매들이 고안하고 척척 해낸다.
정 강사는 “할머니들이 각자에게 맞는 안무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를 그룹 전체 동작으로 맞추고 있다”며 “멤버 손발이 워낙 잘 맞는다”고 말했다.
‘칠곡 할매글꼴’ 주인공 추유을 할머니(89)도 신4리 마을회관 구성원이다.
8년 동안 어르신 곁을 지킨 정 강사는 “어르신들 모두 긍정적이고 정말 유쾌하다”면서 “배움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고 연이은 스타 배출 비결을 귀띔했다.
할매들은 각자 쓴 일기와 시로 개인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다양한 춤에도 도전하고, 요양원과 초등학교 등 희망과 웃음이 필요한 곳에서 공연도 이어갈 계획이다.
정두이 할머니는 “오랫동안 마을회관에서 한솥밥을 먹어서 그런지 말을 안해도 합이 잘 맞는다. 머리를 쓰고 몸을 움직이니 한결 건강해졌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희망과 용기를 얻고 무엇보다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며 활짝 웃었다.
칠곡=유건연 기자 sower@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