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지역 열과 현상 ‘심각’ 국지성 호우·무더위 반복돼 발생정도 정상 범주 넘어서 수확량 감소·대과 비율 증가 “영세·고령농 구제책 마련을”
“귤이 다 터지고 떨어져 나무에 남은 게 거의 없습니다. 올해 농사는 완전히 망쳐버렸지 뭐예요.”
최근 찾은 제주 서귀포시 효돈동의 한 노지감귤농장. 농장주 한효민씨(53)는 감귤의 열과(열매터짐) 피해를 호소하며 이같이 말했다.
농장에 들어서니 반으로 갈라져 속살이 훤히 드러난 감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아래는 떨어져 썩은 열매로 뒤덮여 바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노지감귤의 열과는 생육기에 일부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올해는 정상 범주를 크게 넘어선 재해 수준의 피해가 생겼다고 농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씨는 “20년간 감귤농사를 지으면서 열과가 이렇게 심한 적은 처음”이라며 “평년에는 5% 정도 발생했는데, 올해는 최대 70% 이상 과일이 터져버렸다”면서 고개를 떨궜다.
피해는 제주시보다 서귀포지역에 집중됐다. NH농협손해보험 제주총국에 따르면 올 8월1일부터 이달 14일까지 감귤 농작물재해보험 사고접수 건수는 6529건인데, 이 가운데 서귀포지역이 5813건으로 전체의 90%에 육박한다. 아울러 제주도농업기술원이 이달 초 착과량 대비 열과 발생량을 조사한 결과 서귀포지역 열과 발생률은 평균 12.6%로 나타났다. 암반 지대에 조성되거나 수세가 약한 과수원처럼 피해가 심한 곳은 45%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농가와 전문가는 장마철이 지났음에도 국지성 호우가 내리고 무더위가 계속되면서 피해가 커졌다고 분석했다.
실제 제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8월 서귀포에서 비가 관측된 날은 총 13일이며, 하루 최대 강수량이 75.6㎜를 기록한 날도 있었다. 같은 기간 최고 기온이 30℃를 넘은 날은 23일에 이른다. 특히 많은 비가 짧은 시간에 쏟아지는 폭우와 강한 햇빛이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되면서 감귤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김창윤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소장은 “고온으로 건조한 상황에서 폭우가 쏟아지면 열매가 수분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서 “이후 다시 햇빛에 노출되면 급격히 온도가 올라 열매가 견디지 못하고 터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노지감귤은 수분과 일조량 등 환경을 조절할 수 없어 날씨 변화에 취약한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열과 발생 증가는 수확량 감소로 이어진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나마 남은 감귤도 상품성이 떨어질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한 나무에 열매가 적정량 달려야 양분이 고루 퍼져 소비자가 선호하는 중간 크기 과실의 생산 비율이 높아진다. 그러나 나무에 달린 감귤수가 적으면 여기에 양분이 과하게 몰려 대과가 많아진다.
1만1901㎡(3600평) 규모로 노지감귤을 재배하는 정유석씨(53·효돈동)는 “열과로 감귤이 많이 떨어지면 남은 감귤이 비대해진다”면서 “소비자 선호도가 낮은 대과는 시장 가격이 높게 형성되지 않아 같은 양을 수확해도 중간과 대비 소득이 떨어진다”고 한숨을 쉬었다.
농가들은 기후변화로 이런 현상이 앞으로 지속될 것이라며 행정당국이 관심을 두고 발 빠르게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씨는 “아열대 기후로 변화하면서 이전에 없던 피해가 나타나 걱정”이라면서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 구제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씨도 “노지감귤농가는 대부분 시설하우스 투자가 어려운 영세농이나 고령농”이라며 “이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에 도 관계자와 서귀포지역 농협 조합장 등은 최근 지역에서 해당 문제를 논의하는 간담회를 열었다. 이들은 열과 피해 현황을 공유하고 대응 방안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백성익 제주감귤연합회장(서귀포 효돈농협 조합장)은 “지역별 피해 현황에 따라 심한 곳을 먼저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강조했다.
김성범 중문농협 조합장은 “칼슘제 공급과 같이 피해 농가가 피부에 와닿을 지원책을 세워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김학수 도 감귤유통과장은 “열과문제는 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면서 “피해 산정 기준과 피해 지원을 위한 예산 확보 등 대응책을 여러모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귀포=심재웅 기자
daebak@nongmin.com
=CAPTION=
반복된 폭우와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노지감귤.
제주 서귀포시에서 감귤농사를 짓는 한효민씨가 열과로 떨어져 썩어가는 감귤을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