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36도 폭염에 노인들은 지하철로…“혼자서 무슨 에어컨을 트나”
입력 : 2023-08-16 17:30
수정 : 2023-08-22 16:30
폭염 취약 노인들, 지하철로 몰려
지난달 지하철 이용 노인 지난해 같은 달보다 75만명↑
전문가들 "정부·지자체 노년층 냉방복지에 관심 기울여야"
보건복지부, 폭염 대비 취약 노인 보호 대책 강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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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노인들의 모습.

“밖엔 더우니까 지하철 타지. 에어컨 바람 쐬면서 사람 사는 세상 구경도 하고. 집에서 혼자 에어컨 틀면 전기세만 아까워. 돈 한 푼 못 버는 노인네가…”

1일 오후 3시 서울 낮 최고기온이 36도까지 오른 가운데,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 노약자석에 앉은 이모씨(75)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씨는 "지하철은 그나마 노인들한테 공짜니까 다들 이렇게 여기서 더위나 피하는 거지"고 덧붙였다.

탑골공원이 위치해 노인들이 많이 오가는 서울 지하철 5호선 종로3가 역사에서 부채질하던 김모씨(92)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김씨는 이날 오전 금호역에서 열차를 타고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 끼니때 맞춰 집으로 돌아가 식사하고 다시 열차를 탔다고 한다. 그는 "(더위를 피하려) 복지관 같은 곳도 가봤는데 여러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불편했다"며 "나같이 완전히 늙은 노인네는 갈 곳이 딱히 없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인근 역사 내 벤치에는 김씨처럼 열차가 수없이 오가도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는 노인들이 꽤 많았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김모씨(75)도 지난 주말 낮 서울 지하철 9호선 등촌역에서 개화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김씨의 목적지는 복합쇼핑시설이 위치한 김포공항역이었다. 건강을 위해 하루 1만보 걷기를 실천하던 김씨는 최근 불볕더위에 지하철과 이어진 실내 공간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이처럼 노인들이 폭염에 냉방시설을 찾아 지하철로 향하는 일이 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달 1∼25일 지하철 1∼8호선을 이용한 65세 이상 노인은 1468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393만명보다 약 75만명 늘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코로나19 엔데믹 전환 이후 그동안 ‘밀집지역’으로 분류됐던 지하철에서 폭염을 피하는 노인이 작년보다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또 현행 65세 이상은 지하철 요금이 무료이기에 경제적 부담이 없는 점도 노인들이 지하철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인터뷰한 노인들 대부분은 무료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물가 상승으로 인해 식사는 집에서 챙겨 먹는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노인들의 이 같은 ‘지하철 피서’가 여름철 폭염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정부·지방자치단체가 노년층 냉방복지 대책에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폭염 민감 계층의 건강피해 최소화 방안’ 보고서를 통해 “노인 등 폭염 민감 계층이 (지하철이 아닌) 주거지 인근에서 무더위 쉼터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내 다양한 자원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보건복지부는 무더위로 인한 취약 노인들의 피해 예방을 위해 폭염 대비 보호와 지원대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5월부터 ‘폭염 대비 취약 노인 보호 대책’을 시행 중으로, 폭염특보 발효시 노인 맞춤 돌봄서비스 전담인력이 전화나 방문을 통해 노인 50만명의 안전을 확인해 폭염 대응 행동요령을 안내하고 있다. 또 응급안전안심서비스를 통해 취약노인 가구 응급상황을 감지 중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경로당과 노인복지관 등에 폭염 대비 행동요령과 건강수칙을 홍보하고 있다”며 “지자체와 함께 취약노인 보호대책 현황을 계속 점검하겠다”고 말했다.

강원=양재미디어 기자 yjmedia@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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