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들의 들판에서 ‘연기’ 피어오른다
입력 : 2023-01-09 13:36
수정 : 2023-01-31 14:58
평생 연기하고 싶던 연극인들
농촌으로 터전 옮겨 ‘이중생활’
낮엔 농사짓고 밤엔 연기 연습
산·논·밭서 펼쳐지는 이색무대
농한기 이웃 농부들은 배우로
농번기 관람객, 일꾼으로 변신

충북 단양군 영춘면엔 존재감 넘치는 새빨간 건물이 한채 있다. 대문엔 ‘만종리 대학로 극장’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이곳에선 주말마다 사람들을 울고 웃기는 연극이 펼쳐진다. 7년 전 허성수 감독(55)이 배우 10여명과 힘을 합쳐 문을 연 극장이다. 허 감독은 여기서 대본을 쓰고 연극을 올리는 동시에 농사까지 지으며 바쁜 삶을 산다.

허 감독이 자신의 고향인 단양에 정착하게 된 건 2015년 봄부터다. 이전엔 서울 종로구에 있는 대학로에서 단원 30명이 있는 ‘극단 76사단’ 수장 역할을 하며 연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극장 임대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고 연극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는 생활비조차 충당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허 감독은 자신을 따르는 극단원 몇몇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극장을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마음 놓고 연극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수입원을 찾는 게 급선무였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부모님 어깨너머로 배운 농사일에 도전해보려고 단양을 찾게 됐죠. 농사를 지으면서 번 돈으로 무대를 꾸미고 극을 올리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어요.”

마을사람들은 허 감독과 극단을 두팔 벌려 환영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온 이들에게 연습 장소를 내어주기도 했다. 극단은 이름을 ‘만종리 대학로 극단’으로 바꾸고 마을회관과 방범초소에서 매일같이 연기 연습에 몰두했다. 허 감독은 주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자 ‘마을 식당’을 운영했다. 배우들이 남는 시간을 쪼개서 직접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했다.

“주민들과 식사하고 술 한잔 기울이면서 이들에게도 마음속 깊이 문화 예술에 대한 갈망이 있고, 숨겨둔 끼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연기하고 싶은 사람을 찾아서 체계적으로 발성 연습과 동작 연습을 시켰어요. 생업 때문에 바쁘지만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연습하면서 내공을 키웠죠.”

‘주민 배우’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자 낭독회를 종종 열었다. 아직은 관객 앞에서 연기하기가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짧은 대사를 주고 경험을 쌓게 한 것. 무대에 한번도 서본 적 없는 사람도 처음엔 더듬더듬 문장 읽는 것에만 집중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풍부한 감정을 넣으며 자못 배우처럼 연기하기 시작했다. 한 주민 배우는 “내가 화려한 조명 아래 서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막상 도전해보니까 심장이 뛰고 너무 재미있다”며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시골 마을은 배우가 서는 곳마다 무대가 됐다. 양을 치는 목동 이야기를 다룬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 작품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오기산에서 극을 올렸다. 해발 700m 고지에서 배우들이 열연을 펼쳤는데 관객들은 “정말 소설 속에 있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아 감동이 배가됐다”며 후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수확이 모두 끝난 밭 한가운데서는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다룬 ‘별이 빛나는 밤’이란 공연을 했다. 배우들이 밤새워 못질하며 만든 무대는 16.5㎡(5평) 규모로 협소했지만 오히려 관객과 가까이서 소통하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

“극을 올릴수록 완성도가 올라갔고 관객수도 눈에 띄게 늘었어요. 이젠 제법 팬층이 두꺼워져서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연극을 보려고 찾아오는 분들도 꽤 있죠. 아무래도 서울에선 정형화된 무대에서만 연극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선 산과 들에서 생동감 넘치는 연기를 감상할 수 있으니 마니아층이 생길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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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군 영춘면에서 '만종리 대학로 극장'을 운영하는 허성수 감독이 무대장치를 손보고 있다. 단양=지영철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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